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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 이야기 2 – ![]() 글 한국역사연구회/돌베개 |
책을 출판하다
제6장 개설기간
7부 식민지 시대
8부 모던
시각적 데이터의 수집 및 출처
참조 534
찾다
제6장 개설기간
한국이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에 병합된 1910년까지의 기간이다.
1860년대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서구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전개되었다. 조선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았다. 홍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서원을 폐지하여 무너진 왕권을 강화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외세를 물리쳐 내권을 확보했다.
1873년 조선 정부가 정부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국정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선 정부는 중국과 일본의 개혁을 참고로 한국을 근대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은 일본·일본·청·청·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근대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
조선 정부는 통지국, 훈련대, 내무성 등 신설된 조직을 중심으로 근대적 국가체제 구축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구군, 민씨 일가와 정찰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동학교회는 지방 관리들의 비리와 착취로 고통받는 백성들과 연합하여 전국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다. 개화파는 일본의 비호 아래 갑오개혁을 추진하여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시도하였으나 삼국과 아관파천의 개입으로 패배하였다. 이후 독립단체를 만들어 조선을 입헌군주제로 만들려는 시도도 절대군주제를 원했던 고종과 부딪히면서 무산됐다.
고종은 황실을 중심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인해 어려워졌다. 입헌군주제와 민권연대 세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내정을 장악했다. 항거한 양반유생과 구식군은 처절한 희생을 치렀고, 개화세력은 백성을 계몽하고 국력을 높이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국명을 조선으로 개명하면서 한국은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7부 식민지 시대
일본이 식민지가 된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한 1945년까지의 기간이다.
식민지 시기는 한국 현대사의 역동적이고 복잡한 발전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한국은 유례없는 시련을 겪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제국은 대한제국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체제를 수립하여 민족말살(민족동화)을 도모하면서 한민족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약탈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대륙침략과 일본자본의 활동에 적합한 식민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고, 일본에 대한 사회경제적 예속과 민족간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조선인들은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방법과 방법이 수행되었습니다. 나. 비밀결사운동, 독립군창건운동, 기능개량운동, 사회주의운동, 영웅투쟁, 무장투쟁. 그리하여 그는 3×1운동을 창시하였고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민족적 협력과 통일전선운동을 끊임없이 추진하였다. 그 결과 계층, 지역, 세계관,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정체성과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중국혁명력량, 일본반제력량과 함께 반제연대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한국 사회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근대화되었다. 외국의 신기술, 학문, 사상, 제도, 문화 등은 수용과 변용의 과정을 거쳐 확산되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쳐 현대적으로 변모한다. 농민, 노동자, 청년, 학생, 여성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했고 다양한 대중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민족주의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운동 세력이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놓고 다투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해방 직전 각 세력의 이념적 지향은 정치적으로는 민주공화국, 사회경제적으로는 평등사회의 실현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이 해방 후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좌표가 되었다.
8부 모던
[1945년해방부터현재까지의현대사를다룬다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에서 해방되자 미군과 소련군은 38도선을 따라 한반도를 분단하고 점령했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도출된 결론이었지만, 그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남북한 사이에 이견이 생겨 결국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는 미국과 미군의 점령, 양국의 정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협상,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으려는 한국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남과 북에 정부가 수립되었고 곧 내전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면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인명 피해도 컸다. 4·19 직후와 1980년대 후반 민중통일운동, 1970년대 남북회담, 2000년대 이후 남북교류협력운동, 6·15 남북수뇌 공동성명, 판문점- 2018년 선언, 남북은 여전히 통일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원조경제, 1960~70년대 개발독재를 경험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고도성장을 이루었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큰 위기를 맞았다.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 부실기업 청산, 대량해고와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 등 부단한 노력 끝에 위기에서 벗어났다. 또한 경제력의 국내 집중화와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0위를 넘어섰지만 동시에 정책 등 해결해야 할 다양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4·3혁명, 6·3항쟁, 반3선 개헌운동으로 이어진 1960년대 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유신운동, 야권민주화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은 1970년대 민중운동과 연결되어 1979년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여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종식시켰다. 1980년 5월 전두환 등 신군부 정권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서울의 봄’이 그 속편이라면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중화와 더 조직화 된 하나의 대중 운동.
1987년 6월항쟁은 민주주의 제도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의 성장은 민주화의 사회적 기반을 강화시켰다. 2000년대 들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효순·미선 사건, 광우병 등 한국 사회의 주요 쟁점이 제기될 때마다 촛불집회는 한국 고유의 공적 행위가 되었다. 1998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낡은 부패 청산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민사회 참여를 확대하고 촛불혁명으로 승화한 사회.
국민참여 확대를 통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민주적 사상과 의식의 계몽, 문화다양성 확대를 동반하였다. 군사독재 하에서의 극심한 이념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민주화운동을 거치는 동안 지식인, 학생, 문화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정치·사회적 개혁을 위한 지적 탐구는 계속되었다.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이 공론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진지한 계몽과 과거사의 정리 등 시민의식과 역사의식이 지속적으로 고양되었다.
최근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SNS가 발달하면서 대중문화는 뉴미디어, 디지털 문화와 결합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방탄소년단의 세계적인 팬덤 현상과 영화 〈기생충〉, 〈미나리〉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보듯 한류는 이제 동아시아의 유행을 넘어 전 세계인이 공유하는 문화 아이콘이 됐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위상이 격상되고 K-방역이 모범 방역체계로 주목받고 있는 만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라이프스타일과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있다. . 관찰하다.

